한참이 지난 이야기가 귓전을 맴돈다.
정년퇴임을 하기 전 일이다. 2018년 겨울 서울에서 만난 재경동문회 권회장이 행사장 분주함을 뚫고 진지하게 다가와 온갖 소음들 사이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 주었다. ‘교장선생님 대한민국의 살아있는 모습을 보려면 동대문 시장을 봐야 합니다. 특히 야간에 펼쳐지는 구) 동대문운동장 인근의 시장들을 학생들과 함께 꼭 탐방해 보길 권합니다.’ 마음에 꼭 담아두고 실천해 보리라 했건만 현직에 있을 땐 정작 가보질 못하고 최근에야 체험할 기회를 얻었다.
밤 11시30분 이후에 개장하는 청평화시장, 동평화시장, 그리고 디오트, DDP, 광희패션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대형 상가들이 즐비하다.
자정을 넘어가는 시간 대낮같이 환한 조명들 사이로 분주히 움직이는 배달 짐꾼들의 헐떡이는 숨소리와 산더미 같은 짐들이 정신을 혼미하게 할 정도이다.옷 보따리를 걸머지고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는 젊은 상인들이 유독 눈에 많이 띈다. 연신 스마트폰을 확인하며 메모장을 체크하는 저들의 눈망울은 전쟁터의 사수 마냥 매섭기까지 하다. 한 바퀴를 돌았는지 양어깨에는 비닐 포장지에 꽁꽁 묶인 옷보따리들이 주렁 주렁 매달려 있고 상가 모퉁이 은행 나무 곁에 가지런히 쌓아둔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식히려는 듯 담뱃불을 붙여 길게 한 모금 빨았다가 내 뱉은 후 반절도 타지 않은 담뱃불을 투박한 발로 비벼 끄며 또다시 길을 나선다.
청계천 옆길을 따라 걸어본다. 밤을 잊은 청계천은 고요함 가운데서도 맑은 물이 끝없이 흘러간다. 분주히 오가는 차량들의 행렬이 여느 대낮 시장 주변보다 더 복잡하다. 길섶 주차장의 요금표를 보니 10분 단위로 끊어서 받는데 서울 도심 주차비보다 더 비싸 보인다. TV에 나오는 ‘동네한바퀴’처럼 두리번 거리며 걸어본다. 청평화상가 뒤편 오렌지 색으로 치장한 디오트 상가가 눈에 들어온다. 디오트 안은 대낮처럼 환하고 형형색색의 옷들이 저마다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시선에 도매상가의 활력이 세계를 요동치는 것처럼 다가왔다. 상가 어귀 쉼터엔 젊은이들이 가득하다. 돈가방을 어깨에 가로메고 쇠사슬 같은 장식물을 주렁 주렁 단 요란한 패션 감각을 드러내는 20대 숙녀 상인부터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한 손에는 스마트폰 다른 한 손에는 담배를 물고 연신 흰 연기를 내뿜는다. 개중에는 전자담배를 물고 있는 듯 타 들어가지 않는 담배의 연기를 하늘을 향해 길게 뿜기도 한다.
나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 보니 오늘따라 잔뜩 구름이 끼여있다.
골목길을 들어서니 손목시계는 1시 20분을 넘어가고 있다. 환하게 열린 작은 식당들이 손님들로 북적인다. 형형색색의 앞치마를 하고 머리에 배달 음식을 3층, 4층으로 올린 굳건한 아줌마들의 발걸음이 보무도 당당하다.
골목안 줄지어 선 식당들의 화려함은 주변 상가를 더욱 생기있게 만드는 삶의 발전소와 같은 것일게다.
2시를 넘어서니 대형 상가 주변에는 화물을 싣고 갈 차량들이 줄을 잇는다.
매직으로 쓴 글씨를 보니 지방으로 가는 것도 있고 외국으로 팔려가는 물건들도 있어 보인다. 끝없이 이어지는 배송 집하장에는 세계 패션 시장을 주름잡는 대한민국의 저력을 보는듯하다. 그 사이로 오토바이 배달맨들이 곡예하듯 검고 흰 보퉁이들을 산더미처럼 싣고 분주히 움직인다. 청계천의 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숨쉬고 있었고 그 운동력은 대한민국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임을 확인했다.
다시 동대문역사공원 뒤 DDP상가로 향했다. 이곳 역시 젊은 상인들의 활기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간간히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걸 보니 외국인 바이어 들인 것 같다. 저들 역시 엄청난 양의 짐들을 옮기며 수량을 체크하기에 바빠 보였다. 숙녀복, 아동복, 신사복 할 것 없이 모든 종류의 패션을 앞서가는 제품들이 세계를 향해 숨돌릴 틈 없이 요동치는 것을 보니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듯 하다.
잠시 쉬어갈 겸 길거리 작은 가판대에서 파는 아메리카노를 들고 부채꼴로 설치해 둔 길가 의자에 앉아 잠시 쉬어본다. 제법 시월의 새벽 공기가 서늘하게 느껴진다. 커피 가게엔 대형 시장 가방을 둘러맨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신세계를 보는 듯 밤이 즐거웠다. 좋은 체험을 소개해 준 권회장이 고맙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