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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ante로 살아가기

by 信泉 2021. 10. 11.

Andante 음악에 사용하는 용어로 느리게’ ‘걸음걸이 빠르기로 연주하라는 뜻을 가진 이탈리아어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원래 걸음걸이 빠르기는 느리게 걷는 것인데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빠르게 걷고 또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 매몰되어 버렸다.

이제 Andante의 삶으로 돌아가 보기로 한다.

이른 새벽 자연스레 눈은 떠지고 시계는 5시를 가리킨다. 약속이나 한 듯 아내와 동시에 일어나 느림보 여행을 떠나기 위한 간단한 준비물을 군 복무 시절 5분 대기조처럼 챙긴다. 준비물이라야 할 것도 없는 생수 한 병, 어제 군산 이성당에서 사 온 먹다 남은 팥빵과 야채빵, 혹시나 필요할까 늘 차에 가지고 다니는 꽃무늬 시장바구니... 그리고 아내의 보약 박카스D

행여나 허기질까 쌀국수에 식은밥 말아 후루룩 마신 뒤 집을 나선다.

롯데마트 건너편 대로변 지나가던 택시를 타고 두정역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6, 후불 교통카드가 장착된 카드로 개찰구를 열고 계단을 내려가니 잠시 후면 서울로 가는 열차가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66분 광운대행 열차가 도착한다.

길다란 플랫폼에는 띄엄 띄엄 백팩을 양어깨에 걸친 사람들이 함께 오른다.

오랜만에 타보는 서울행 전철은 창가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의자들이 새벽 공기를 뚫고 찾아온 손님들을 반갑게 맞으려는 듯 편안하게 다가온다.

성환을 지나 평택을 들어서니 창밖엔 가는 빗줄기가 내린다. 열차에 오르는 사람들의 표정은 회색빛 하늘에 불만이라도 있는 듯 하나같이 찌푸둥하다.

대각선 건너편 자리에 앉은 칠십이 가까워 보이는 아주머니는 장거리 출퇴근에 이력이 난 듯 작은 가방은 머리 위 짐칸에 올리고 커블 플라스틱 의자를 엉덩이에 받친 뒤 이내 비몽사몽의 세계로 든다.

서울을 향해 덜컹거리는 열차의 소음이 익숙해질 즈음 회사 로고가 새겨진 작업복을 입은 40대 초반은 됨직한 산업 역군이 건너편 자리 마지막 빈자리를 메운다.

삶에 지친 듯 보이는 그의 모습, 기름때 묻은 작업복과 흙투성이의 투박한 작업화가 순탄치 않은 삶의 여정을 대신 설명해 준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어둡지만은 않았다. 스마트폰을 보며 간간이 웃음 짓는 모습은 무엇엔가 홀린 듯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겨가며 한참을 이어간다. 그가 무엇을 보고 웃음 짓는지 알 수는 없으나 내 짐작으로는 어린 자녀들의 밝은 모습을 봤거나 아니면 얼마 전 사둔 주식이 붉은 화살표로 도배가 되어 미소 지었을거라는 무지막지한 상상을 해 본다. 쓸데없는 상상이었지만 힘들게 살아가는 산업 역군들에게 웃음기를 이어가게 하는 작은 동력들이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실타래처럼 이어지기만을 기도해 본다.

수원을 지나면서 열차는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아직 7시 이른 시간 플랫폼을 걸어가는 발걸음들이 분주하다. 또닥 또닥, 뚜벅 뚜벅, 모두가 바삐 움직이는 새벽은 작은 빗방울에도 약속이나 한 듯 열려지고 있었다.

노량진에 도착할 즈음 객실에 있던 젊은이들이 출입문 쪽으로 몰려간다. 둘러맨 가방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듯 책들로 가득한 백팩이 무거워 보인다. 썰물처럼 밀물처럼 많은 승객들이 내리고 타기를 마치니 이내 힘차게 달리는 전동차의 차창 너머로 노량진 학원 간판들이 더 크게 다가온다.

한강을 가로질러 달리는 전동차 수많은 바퀴들의 연주가 강물에 공명이라도 일으킨 듯 더 요란스럽다. 잠시 후 지하의 철로로 들어서니 출근으로 분주한 발걸음들이 빼곡하다. 출입문의 열고 닫음이 수차례 반복된 후 목적지인 동대문에 도착했다. 두정역에서 새벽 66분 출발한 열차가 2시간 8분을 달려 동대문에 도착했으니 무척이나 긴 시간이다. 1호선 동대문역 4번 출구로 나와 근엄한 대한민국 보물 1흥인지문을 보니 세월의 아픔을 오롯이 담고 있는 듯 묵묵히 맞아준다. 담장에 쌓여있는 돌들은 고난의 역사를 몸으로 말하듯 이끼 낀 틈새로 초록과 세월의 검은 먹물을 동시에 흘려보내고 있다.

수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던 동대문, 과거엔 버스터미널이 자리잡아 전국을 연결해 주었던 심장과 같았던 곳, 대한민국의 경제지표를 알려주던 활기찬 시장과 밤새워 재봉질하던 젊은이들이 있던 곳, 뒷골목 국밥 한 그릇이 천하를 얻은 기쁨으로 만족을 주던 곳, 그 흔적들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으나 오늘도 흥인지문은 지팡이에 의지한 노쇠한 늙은이처럼 오래 오래 그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