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들댁의 아픈 손가락(4)[응급실의 부들댁]
안동 장날 부들댁은 여느 장날과 다름없이 이른 새벽 동해수산에서 늘상 하던대로 생선을 받아 수레에 싣고 육교 밑 횡단보도를 건넌다. 상자를 받치고 생선을 진열하는 것은 수십 년을 해 오던 터라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경지에 달했다. 하지만 왠지 몸이 무거움을 느낀다. 두 아들은 부들댁이 생선 노점상을 하는 것을 오래전에 그만둔 것으로 안다. 큰 아들이 판사가 되고 장가 갈 때 어머니를 향한 가장 큰 조건이 생선 노점 장사를 그만 두는 것이요 그 다음 조건이 친구들과 편안하게 여행이나 다니며 즐거운 마음으로 취미활동을 하라는 것이었다. 혼사를 앞둔 아들 앞에 철석같이 약속했던 부들댁은 사실 두 가지 약속 중 하나도 지키지 않고 지금껏 비밀을 유지하며 생선 장사를 이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십 수년 아들들에게 비밀을 유지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2일, 7일에 열리는 안동 장날에만 장사를 하는데 영업시간 중에는 아예 휴대전화를 받지 않았고 장사하는 시간도 낮 12시 이전에 모든 것을 정리하는 철칙을 세워 나름 고정 고객들에게 신뢰를 쌓았고 아들들에게도 시치미를 뚝 떼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예전 같지 않다. 식은 땀이 나고 온 몸이 두들겨 맞은 듯 쑤신다. 급한 맘에 네거리 근처 늘푸른약국에 들러 체한 약을 먹고 삔침으로 손가락을 찔러 피를 빼 보았지만 답답한 가슴과 나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간고등어 사이소’ 소리 칠 기운조차 없다. 손수레의 기둥에 의지해 힘을 내 보지만 아무래도 몸이 말이 아니다. 생선 상자 두 개를 겹쳐 놓고 걸터 앉았는데 그만 이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쓰러진 부들댁을 과일가게 안주인이 보고 급하게 부축하여 가게 안 작은 들마루에 누이고 옛 어른들이 하던 방법을 이내 생각해 내고 따뜻한 물에 청심환 한 알을 숟가락에 풀어 마시게 하지만 숨을 헐떡이며 의식이 없는 부들댁은 물 마실 힘도 없다. 과일가게 바깥 양반이 119로 전화하여 급한 상황을 설명하니 때마침 근처를 임무를 마치고 지나던 구급차가 번개처럼 출동했고 부들댁은 지척에 있는 성소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워낙 신속하게 이루어진 일이라 모두들 정신이 없었고 과일가게 안주인이 보호자처럼 초조한 마음으로 병원 응급실을 지키고 있었다. 무슨 검사가 그리 많은지 숨은 헐떡이고 쉬고 있지만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부들댁을 의료진들은 침대에 눕혀 이 방 저 방으로 긴급하게 끌고 다닌 한 참 후에 부들댁의 의식은 돌아오고 담당 의사는 보호자를 보자고 한다. 엉겁결에 과일가게 안주인이 보호자로 나서지만 의사는 가족을 찾는다. 부들댁에게 사정을 이야기 하니 부들댁은 나랏일에 바쁜 큰 아들에게는 연락을 하면 안된다고 연락처도 주지 않고 둘째 아들은 외국에 있다고 완강하게 거절한다. 그러면서 부들댁은 자기는 죽을 병이 아니기 때문에 괜찮다고 자신에게 직접 이야기 해 달라고 조르며 이야기 한다.
보호자를 부르라는 담당 의사는 다른 환자들을 진료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과일가게 안주인은 난감한 상황을 맞이했다. 안내 책상을 지키고 있는 간호사에게 사정을 이야기 하니 가족이 없으면 믿고 전해줄 수 있는 분이 있으면 좋겠는데 혹시 교회에 나가시면 목사님에게 라도 연락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불교 신자인 과일가게 안주인은 부들댁이 교회에 나가는 것은 알았지만 어느 교회에 나가는지 또 목사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기에 환자를 두고 답답함을 호소할 수는 없는 지경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나무관세음보살’만 되뇌일 뿐이었다. 병원 응급실 수간호사를 찾아 도움을 청하니 기독교 병원이라 그런지 원목실 목사님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부들댁의 귀에 한 참을 이야기 하더니 이내 알았다는 듯 휴대 전화기로 급하게 연락을 한다. 10여분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말끔한 양복 차림의 젊은 양반이 들어오더니 부들댁의 손을 꼬~옥 잡고 눈을 감은 채 알 수 없는 이야기만 중얼 중얼한다. 과일가게 안주인을 향해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는 안동교회 이목사입니다. 바쁜데 가셔서 일 보시고 여기 일은 제가 다 처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 젊은 양반이 예의도 바르고 훤칠하게 생긴 모습이 부잣집 아들 같다는 생각을 안고 과일가게 안주인은 가게로 돌아갔다. 부들댁을 안심시킨 이목사는 담당 의사를 만나 서로 잘 아는 듯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어간다. 한 참 뒤 이목사는 부들댁을 간호사와 함께 병실로 옮기고 차분하게 부들댁을 설득한다. "집사님 지금 집사님의 건강 상태가 조금 더 검사를 해 봐야 하는데 큰 병원으로 옮겨서 정밀 검사를 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서울에 있는 아드님께 연락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목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들댁은 "목사님 안됩니다. 우리 아~가 얼마나 바쁜데 애미 일로 연락을 하면 나라를 지키는 큰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며칠 푹 쉬면 괜찮아 질낍니더" 평소 반듯한 성품에 깐깐하던 부들댁이 만만치 않음을 아는 이목사는 걱정이 태산이다. 하는 수 없이 교회의 다른 분들과 연락을 하더니 이내 방침을 정했다는 듯 부들댁을 안심시키고 서울로 모시고 갈 병원을 수소문한다. 다행히 서울의 대형 병원에 인맥이 있는 의사 선생님이 주선해 준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갈 채비를 하고 교회 승합차를 이용해 떠난다.
중앙고속도로 죽령터널의 긴 어두움을 지나 제2영동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를 부지런히 달려 올림픽대로에 들어서니 긴 차량의 줄이 부들댁을 가로막는다. 비상등을 켜고 운전석 창을 내린 채 손짓으로 양보를 청하며 복잡한 시내를 간신히 빠져 나가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도착하니 벌써 밤이 늦은 시간이다. 다행히 미리 예약을 해 두고 검사 자료를 넘겨둔 터라 수월하게 입원을 하고 병실에 몸을 눕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부들댁이 병실 침대에 눕자마자 아들 광율이와 며느리가 헐레벌떡 들어온다. 어찌된 영문인가? 기운없이 누워있던 부들댁이 너무 놀란 나머지 그만 벌떡 일어나 버린다. 어머니의 병원 입원을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연유를 물어본 즉 큰 아들 광율이가 퇴근 길에 모처럼 안동 어머니께 전화를 했는데 휴대 전화는 꺼져있고 집 전화는 아무리 신호가 가도 받지를 않으니 너무나 답답하여 몇 시간을 허둥대다가 마지막으로 어려울 때마다 교회 기도실을 찾아 힘을 얻는 어머니를 기억하고 혹시나 하며 교회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더니 교회 사무실 직원이 전화를 받고 당황하며 옆사람에게 전화기를 바꿔주는데 자신은 김목사라고 하며 차분히 여간의 사정을 설명해 주었고 급한 마음에 집에도 들리지 못한 채 퇴근길 아내와 병원 주차장에서 만나 황급히 들어왔노라고 한다. 어머니의 병세가 위중함을 직감한 광율은 잠시 이목사를 복도로 불러내 여간의 사정을 듣고 두 손을 꼭 잡은 채 기도를 부탁한다고 하며 고개를 숙인다. 어머니를 위해 먼 길을 동행해 준 이목사와 일행에게 감사를 전하고 배웅한 뒤 어머니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굳은 손을 꼬~옥 잡는다. 아직 어머니의 손끝에는 생선 비린내가 베어있다. 50 중반을 넘은 광율의 도수 높은 뿔테 안경이 가리운 눈가엔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언제나 부지런하고 차돌 같았던 어머니가 어찌 이렇게 약해 지셨는지
6인실 병실의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아들의 눈물과 한숨은 한참 이어진다. 잠시 후 뒤따라 들어온 며느리와 병원 직원이 병실을 편한 방으로 바꾸었다고 하고 1인 병실로 간호사들이 부들댁을 옮긴다.
1인실 이긴 하나 그 병실은 환자용 침대와 보호자 침대, 4인용 소파 그리고 전용 화장실과 간단한 조리시설이 깔끔하게 준비된 TV에서나 보던 좋은 VIP용 병실이었다.
아들 광율은 어머니께 말문을 연다. "어머니 제가 너무 무심했어요, 죄송해요 이제 걱정하지 마시고 편안하게 검사받고 치료 잘 할 수 있게 할테니 마음을 푹 놓고 기도만 하세요" 아들의 말에도 부들댁은 아들을 걱정한다. "아니다 괜히 나 때문에 니들 걱정만 끼치고 나라일을 하는데 내가 큰 짐을 지우는구나" "아니예요 어머니 저는 내일 잠깐 출근하여 일을 정리하고 휴가를 내면 되고 이 사람도 다른 변호사들에게 일을 부탁하면 되니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에게 어머니의 병환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있겠어요?"
애써 태연한 척 아들 내외는 부들댁을 안심시킨다. 그 와중에도 며느리는 연신 작은 인형이 달린 휴대전화기를 들고 병실을 들락 날락한다.
다음 날 늦은 오후 부들댁의 중요한 검사 결과를 두고 담당 교수와 아들이 심각한 대화를 한다. 병명은 오랫동안 진행이 된 췌장암 말기이며 머리에는 뇌동맥류가 생겨 꽈리가 생긴 부분을 급하게 시술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하는데 결과는 환자가 연세가 많으시고 체력이 워낙 떨어진 상황이라 회복을 장담하기 어렵다고 한다. 청천벽력 같은 상황을 맞은 광율은 애써 담담해 지려고 한다. 냉정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눈가에 잘게 떨리는 경련으로 대신해 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오늘의 자리에 오른 광율이건만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시장통에서 겪었던 아픔들이 가슴속 깊이에서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초임 판사 시절 지방법원을 옮겨 다니며 사건을 판결할 때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새기며 약자들의 아픔을 헤아리려 애썼다. 때로는 폭력을 휘두른 불량한 이들에게 강한 훈시를 남기기도 했고 형편이 아주 어려운 사람이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저지른 장발장 범죄에 대해서는 벌금을 선고한 후 그 벌금을 자신이 대신 납부한다고 판결하여 재판정에 있는 사람들을 감동케 한 사연이 언론에 보도 되었던 바로 그 주인공이 부들댁의 큰아들 광율이었다.
어머니와의 어린 시절 기억들을 되새기며 청렴을 몸소 실천하고 판결에 정치적인 색채를 입히지 않았다. 사건마다 법의 잣대를 엄격하게 적용하는 광율의 판결문은 사법연수원 연수생들에게는 지금도 교과서처럼 사용되고 있다.
지금은 서울에 있는 법원 높은 자리에 올라 온 몸에 신망을 받는 법조인으로서 때로는 정부 요직에 임용될 최우선 순위라고 평론가들에게 이름이 오르내리는 존경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머니의 병환 앞에 명판사 김광율의 기개는 무너지고 가까이에서 어머니를 편히 모시지 못한 회한이 한없이 밀려온다. 우선 부풀어 오른 뇌동맥류 시술을 급하게 하고 현대 의학의 최신 의술을 동원한다 한들 어머니의 남은 삶이 3개월 정도라니 생각할 수록 가슴이 미어진다. 창가에 비친 햇살을 따라 비치는 자신의 그림자가 오늘따라 초라하게 드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