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을 사랑한 선각자 한 분을 소개합니다.




@@@ 일제 치하 모진 압제속에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사랑하고 가꾸어 온 선각자 한 분을 소개합니다.
井堂(정당) 權寧達(권영달) 선생입니다. 1941년 일제의 한글 압제가 최고조에 달할 때 조선어문정체(덕흥서림)라는 저서를 출간하여 총독부로 부터 감시 당하는 요시찰 인물이 되어 많은 고초를 받았습니다.
정당 선생은 1930년 중외일보에 12회에 걸친 연재를 통해 우리 말과 글을 바르게 이어가자고 역설했습니다.
잊혀져 가는 井堂 權寧達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가 봅니다.
井堂 權寧達 선생에 관한 기록
1. 중외일보 소화5년(1930년) 1월 26일, 29일, 31일, 2월 1일, 2일, 4일, 6일 총 7회(조간신문 1면 게재) “高音의 本質과 記寫法”(硬音 辨證을 읽고서)연재
2. 중외일보 소화5년(1930년) 9월 8일, 19일, 20일, 25일, 26일 총 5회(조간신문 1면 게재) “朝鮮文綴字法”(標準樹立에서 批判에로) 연재
3. 1941년 (소화 16년) “朝鮮語文正體”(덕흥서림) 출판
4. 1943년 “朝鮮文綴字法” 遺稿
『정당 권영달의 생애와 어문민족주의』
(井堂 權寧達의 生涯와 語文民族主義)
임 원 수(전 영주제일고등학교 교장)
여는 말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영욕(榮辱)의 세월이 흘렀다. 오늘이 있음은 지난날 수고의 흔적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 치하 암흑의 땅에서 우리 글의 소중함을 남보다 먼저 깨닫고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친 한 사람, 자신 앞에 놓인 보장받을 수 있는 미래를 박차고 나와 혼신의 힘을 다해 우리 글을 지키고자 한 사람, 이제라도 묻혀진 지식인의 삶을 반추하며 그토록 숨죽이며 갈구했던 민족을 향한 외침을 역사의 뒤안길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정당의 생애와 배움
정당(井堂) 권영달(權寧達)은 1901년 10월 5일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406번지에서 부친 권준흥(權準興)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이 가정은 인근 시,군에 토지를 많이 소유하여 가을이면 수확한 벼를 토지세로 갚기 위해 소작인들이 소달구지에 볏 가마니를 싣고 가일동네(가곡리를 가일마을로 불러옴) 동구 밖까지 줄을 이었다고 하니 부친의 재력이 짐작이 간다. 인근에서 부잣집으로 알려져 있었고 영욱, 영달, 영락이라는 이름의 아들만 셋을 두어 주변의 부러움을 사는 집안이었다. 또 세 형제는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학문에 대한 재능이 있었기에 부친은 아들들의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때마침 서울에 머물고 있던 부친 권준흥(權準興)은 병중에 있던 큰집 조카(영식)의 치료를 위해 서울에서 알게 된 미국 의료선교사를 가일마을로 초청하여 서양 의술로 치료를 하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인해 가일마을에 머무는 동안 서양 학문 특히 영어와 수학에 대해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훗날 가일마을 사람들이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10년 중반부터는 지역별로 의숙(義塾), 사숙(私塾), 강습소 등이 잇따라 설립되었는데 가일마을에도 기존의 남명학교와 하회마을에 있던 동화학교(일명 교남학교)가 통합되어 원흥의숙(元興義塾)으로 설립하게 되었다. 당시 마을의 유지였던 권준흥(權準興)이 김태동 등과 주도적으로 관여하였다고 하며 체계적인 교육을 위해 전국의 유명한 강사들을 초빙하여 1주 또는 1개월, 또는 장기간 등의 강좌를 개설하였다. 특히 외솔 최현배 선생이 결혼하기 전 원흥의숙에서 잠시 강사를 하기도 했었는데 지역 양반 가문에서 외모가 준수하고 학식이 있는 외솔을 보고 사위를 삼겠다고 혼담을 주고받은 이야기까지 있었다고 한다.
권준흥(權準興)의 아들 셋은 선교사에 의한 서양학문을 접한 뒤 곧이어 원흥의숙에서 교육을 받았고 둘째인 영달(寧達)은 1920년 4월 서울로 유학을 가 중동학교에 입학하고 이듬해 중등과를 졸업한 뒤 신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서양인들이 사용하는 영어를 공부해야 한다는 부친의 권유에 따라 어릴적 선교사들에게 배웠던 영어를 기초 삼아 1921년 조선기독교 청년학관(YMCA)의 영어과에 입학하여 어학에 대한 기초를 세웠다. 그리고 1922년 4월에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한 후 1925년 경성고등상업학교(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한다. 당시 경성고상은 입학하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하는데 한국인으로서는 권영달과 서울여상 교장을 지낸 다른 한 사람 뿐이었다고 한다.(권영달의 조카 권오걸 증언)
격랑 속에 뛰어든 정당
경성고상 재학 중 1926년 6.10만세 운동이 일어나 정국은 격랑(激浪) 속에 휩싸이고 경성고상에 다니던 권영달과 보성고보에 다니던 동생 권영락은 6.10만세 운동의 주동자인 권오설과 가일마을 한동네 출신으로 시위의 공모자로 인식되었고 일본 경찰의 체포 대상이 되어 숨어 지내다가 한밤중 야음을 틈타 고향 가일마을로 형제는 피신하게 된다. 이후 1927년부터 권영달은 부친 권준흥이 설립대표자로 이름을 올린 예천 대창학원에서 1942년까지 후학들을 가르치게 된다.
대창학원에 재직하면서 꾸준히 한글 문법 연구에 몰두하였다. 당시에는 한글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지 않아 정당 권영달은 일본 경찰들의 주시의 대상이었으며 학생들을 지도하는 일과 시간에도 우리 글과 역사에 대해 강의하는 권영달에 대해서 일본인들의 간섭과 감시가 점점 더 다가왔고 급기야 1938년부터는 우리말과 우리글에 통제하는 총독부의 노골적인 압제가 시작되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8대 종정을 지낸 서암 대종사의 회고록에 의하면 “대창학원에는 권영달이라는 선생이 있었다. 그는 한글을 깊이 연구한 학자였는데 일본인들의 감시를 피해 틈만 나면 한글과 한국의 역사를 가르쳤다. 수업 도중에 시학(장학관)이 오면 얼른 책을 숨기고 딴전을 피우다가 감시자가 떠난 후에 다시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권선생을 통하여 비로소 아이들은 나라가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깨달아 가슴 깊이 묻어 두었다. 가슴속에 묻힌 그 비밀은 큰 슬픔이었고 아물 길 없는 상처처럼 나이가 들수록 세상을 알수록 점점 더 크게 자라났다.”(그대 보지 못했는가, 정토출판. 30P)
성균관대학교 강사를 역임한 제자 김경한의 증언과 기록에 의하면 “정당 선생은 일본인들의 감시를 피해 도서관 서고 사이 마루 바닥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학생들은 구멍이 숭숭 뚫린 마루바닥 사이에서 숨죽이며 한글과 우리 역사를 공부했으며 그 가르침이야 말로 인생의 어느 것보다 귀한 가르침이었다”(하늘과 땅과 사람사이에서, 김경한, 인물연구소, 1978)고 회고한다.
권영달은 나라 잃은 슬픔 속에서도 우리말, 우리글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1928년 조선어연구회와 총독부가 함께한 언문철자법 초안이 발표되었는데 특히 조선총독부의 개정철자법 원안에는 주시경학파 등 민간학자들이 주장해 온 새 받침의 설정과 병서문제가 반영되지 않았으므로 권영달은 1930년에는 전국 일간지인 ‘중외일보’에 12회에 걸쳐 「조선문철자법」(표준수립에서 비판에로)에 관한 원고를 1면 기사로 연재하며 한글 문법의 체계화에 매진했다.
조선어문정체의 출판
수년에 걸쳐 준비한 「조선어문정체(朝鮮語文正體)」 원고를 들고 서울로 올라와 출판사를 찾았으나 1939년 이후 총독부의 감시가 날로 심해져 출판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1941년 덕흥서림에서 출판을 했다. 그러나 또 배포를 앞두고 총독부의 통제로 정식 배포를 하지 못하고 암암리에 일부 서점과 지인들에게 배포가 되었다. 여기에서 웃픈 이야기는 고향 가일마을에도 「조선어문정체(朝鮮語文正體)」 초간본이 전해졌는데 집집마다 책을 받아들고 일본 경찰 감시의 두려움을 느껴 아궁이에 소각을 했다고 하니 일제의 감시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어문정체(朝鮮語文正體)」 출판 후에 권영달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여러 차례 조사를 받았고 신체적인 고초를 많이 겪었다고 전해지는데 당시 서울에서 요식업을 하던 형 영욱과 형수의 노력으로 풀려나곤 했었다고 한다.
예천으로 돌아온 영달은 대창학원에서 계속 후학을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고자 했으나 일본 경찰의 지속적인 감시와 본인의 건강 문제(오랜 집필과 연구 활동으로 관절염을 얻어 걸음걸이가 조금 힘들었음) 그리고 대창학원 관리자들의 비협조로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권영달은 학교를 그만둔 후 한글 문법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하여 아내와 자녀들이 있는 예천 본가를 떠나 고향 가일마을로 가게 되고 부친(권준흥)이 거주하던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406번지에서 1930년 중외일보에 연재하다가 중외일보가 경영난으로 폐간됨에 따라 중단되었던 “조선문철자법” 연구를 정리하게 된다. 당시 조실부모하고 사랑방에서 권영달과 숙식을 함께했던 조카 권오걸의 증언에 의하면 ‘삼촌은 방 귀퉁이에 산더미처럼 자료들을 쌓아두고 연구에만 몰두했는데 이 일을 두고 일가 친척들은 늘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어렵고 힘들게 들어간 경성고상(현 서울대 상대)을 졸업하고 집안을 거두고 세계적인 인물로 성장하기를 바랐던 가문의 입장에서는 경성고상을 중도에 그만두고 내려온 것만도 성에 안차는데 건강까지 상하여 일경의 감시 대상으로 밤낮 연구만 몰두하는 영달이 흡족할 리가 없었다.
비판에서 대안으로
한글 맞춤법에 대한 논리적 연구가 활발한 시기 주시경의 제자가 주축이 된 ‘조선어연구회’와 변호사인 강원도 철원 출신의 박승빈이 주축이 된 ‘조선어학연구회’ 사이에서 양자의 논리적 모순을 모두 비판하는 글을 쓰게되었다. 그런데 훗날 조선어연구회가 한글학회로 이어지고 자연스럽게 주시경학파가 한글 운동의 전면에 서게 되면서 ‘조선어철자법’에 대해 비평의 글을 주로 써온 정당 권영달을 반주시경학파로 분류하면서 정당 권영달은 한글 운동 역사에서 묻히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시할 것은 정당 권영달은 반주시경학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약에 반주시경학파라고 한다면 당시 반주시경학파의 수장격이었던 박승빈이 주도한 ‘조선어학연구회’에 가입했거나 1934년 “한글식 신철자법 반대성명서” 112인의 명단에 들어 있어야 하나 그 어디에도 정당 권영달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즉 권영달은 본인이 경성고상에 다녔다는 학문적 자존감이 가득한 인물로서 어느 학파에 속하기 보다는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 이론적으로 반박하고 생전 출판을 하지 못하고 훗날 유고로 남긴 「조선문철자법(朝鮮文綴字法)」을 통해 대안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권영달은 외솔 최현배 선생과의 인연도 깊다. 원흥의숙에 강의차 여러 차례 방문했던 최현배와 한글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한글 문법을 연구하며 수시로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조카 권오걸 증언)
아픔을 안고 떠난 삶
1945년 8월 광복을 닷새 앞둔 10일날 가족들이 있는 예천 본가를 다녀오겠다고 가일 집을 나선 권영달은 소식이 끊어졌고 온 동네 백여명의 사람들이 밤낮으로 찾아 나섰으나 찾지 못하다가 이튿날 하회마을 강가에 가지런히 벗어둔 권영달의 신발을 찾았고 늘 조카와 한방에 기거하면서 이야기했던 ‘한글을 지켜야 한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모두가 힘을 합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권영달은 자신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하회마을 강가에 신발을 벗어둔 채 자진한 것으로 판단 할 수 밖에 없다.
이후 1945년 10월경 외솔 최현배 선생으로부터 엽서가 예천 본가로 왔는데 그 내용은 서울로 올라와 모교 서울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후 1967년 외솔 최현배 선생이 예천읍 노상리 18번지 본가에 방문하여 정당 권영달의 아내(풍양 조씨 성교)를 만나고 갔다는 것을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손녀(권미향 1957년생)가 할머니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정당 권영달의 슬하에는 2남 3녀의 5남매가 있는데 장남 오성(五成), 차남 오광(五光), 장녀 오명, 차녀 오평, 3녀 오중, 중에서 차남 오광(1936년생)만 생존해 있으며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특히 차남 권오광은 부친의 대를 잇기 위해 1955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진학하여 1959년 졸업하였으나 사업가의 길로 들어가 한글을 사랑한 부친의 대를 잇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평생 살아가고 있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동기동창으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명예교수인 이현복 교수의 회고에 의하면 ‘학문 연구에 의욕이 넘치고, 잘 생기고 멋진 친구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국립안동대학교 사학과 김희곤 명예교수는 “독립운동의 큰 울림 안동 전통마을”(예문서원, 김희곤, 2014)에서 정당 권영달을 언어민족주의자로 명명하고 민족운동을 전개한 선각자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한글에 대한 일본 총독부의 통제가 가장 극심했던 시기에 「조선어문정체(朝鮮語文正體)」를 출판한 것은 목숨을 걸고 한글 사랑과 민족운동을 전개한 권영달의 결실 가운데 하나라고 기술하고 있다.
닫는 말과 제언
이제는 정당 권영달의 한글 사랑과 언어민족주의에 대한 학문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때이다. 먼저 ‘반주시경학파’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1983년 공주대학교 하동호 교수에 의해 「조선어문정체(朝鮮語文正體)」가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서울대학교 고영근 교수에 의해 학문적 평가가 이루어졌으나 미흡한 자료와 개인의 기억에 의존한 기술로 인해 정당 권영달의 생애와 업적들이 자세하게 언급되지 못했고 그에 따른 연구가 다소 미흡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 권영달이 연구했던 시기가 혼란과 주장이 난무하던 시기, 한글 맞춤법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던 시기였음을 감안 한다면 언어민족주의에 혼신의 힘을 다하다가 끝내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못다 핀 한 송이의 꽃이 되어 45세의 나이로 생을 마친 연구자에 대한 새로운 평가로 나타날 것을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권영달, 『조선어문정체』, 덕흥서림, 1941.
∙권영달, 『조선문철자법』, 미출판 유고, 1943.
∙고영근, 『한국어문운동과 근대화』, 탑출판사, 1998.
∙고영근, 『역대한국문법의 통합적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김경한, 『하늘과 땅과 사람 사이에서』, 인물연구소, 1978.
∙김민수, 『신국어학사』, 일조각, 1985.
∙김희곤, 『독립운동의 큰 울림 안동 전통마을』, 예문서원, 2014.
∙송서암, 『그대 보지못했는가』, 정토출판, 2013.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안동 가일 마을』, 예문서원, 2006.
∙한국국학진흥원, 『정산자락에 드리운 절의』, 한국국학진흥원, 2009.